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코마코스 윤리학 (문단 편집) === 제 6 장 좋음의 이데아 비판 === 우리는 철학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친구[* 그의 스승인 플라톤을 말한다.]와의 친분에 금이 간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데아란 감각기관인 눈을 통해 볼 수 있는게 아니라 영혼의 눈으로 볼수있는 형상을 의미한다.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영혼불변한 참된 세계이다. 플라톤은 '보편적 좋음' 즉 모든 좋음의 본이 되는 '좋음의 이데아'를 지안하였지만 몇가지 이유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 첫째, 인간의 이데아와 개별적인 인간이 똑같은 인간으로 설명되고 있다면 굳이 인간의 이데아를 상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인간의 이데아나 인간은 모두 인간인 한에서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음의 이데아나 좋음 역시 좋음인 한에서 아무 차이가 없을것이다. 또한 선의 이데아가 영원하다고 해서 개별적인 선보다 더 선하다고 할 수 없다. 오랜 시간동안 하얀것이 잠깐 하얀것보다 더 하얗다고 할 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이것들을 생각핼 볼때 선의 이데아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 둘째, 우리가 무엇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는 다양하다. 이를테면 지성이 좋다. 탁월성이 좋다. 적당량이 좋다.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음의 이데아가 있다라고 한다면 서로 다른 종류의 대상이 같은 좋음의 이데아를 따라야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단일한 좋음의 이데아를 따른다고 한다면 다른 종류마다 공통점이 있어야하는데 서로 구별되고 차이가 난다. 따라서 다른종류의 대상은 단일한 이데아를 따르지 않는다. 셋째, 하나의 이데아에는 하나의 학문만 존재하므로 좋음이라는 하나의 이데아만 있다면 좋음에 관한 학문도 하나만 있어야하지만 여러 학문들이 존재한다. 넷째, 선은 그 자체로 선한것과 수단으로 선한것이 있다. 만약 그 자체로 선하며 다른 선들과는 독립되어있는 선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논의하는 중이기에 불필요하다. 다섯째, 선의 이데아가 있고 그것을 획득한다고 해도 그것이 여러 학문들에 실제로 도움이 될지도 미지수다. 의사가 선의 이데아를 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치료에 도움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개별적인 인간 건강을 다루며 연구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좋음은 실체(그 자체로 선)와 관계(도구적 선)로 이야기 되는데 실체는 관계보다 본성상 먼저이다. 왜냐하면 관계는 실체의 파생물이거나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체와 관계로서의 좋음은 공통적인 하나의 이데아를 따른다고 보기 어렵다. 일곱째, 숫자 1은 숫자 2의 앞에 존재해야 한다. 2가 있다면 반드시 1이 있어야하며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미뤄생각 해 볼때 수에는 선과 후가 있다. 그런데 수의 이데아가 있다면 이것은 1보다 더 먼저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당시 숫자의 한계가 1이였고 1 이전의 수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표현 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